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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 왕따가 아니었던 시절
작성자 강충권 등록일 2014-04-09 조회수 1600

가난이 왕따가 아니었던 시절

 

나의 학창시절은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1960년도부터 1979년도까지 걸쳐 있다. 정치적으로 다사다난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부친의 잦은 전근에 따라 초등학교 시절 거의 해마다 전학을 하며 다섯 초등학교를 다녔다. 같은 도 내 뿐만 아니라 여러 도에 걸쳐 다녔다. 당시는 어디를 막론하고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시기였다. 결손가정, 상이용사가족 등 6.25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같은 반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급식해주는 옥수수 죽이나 옥수수 빵이 나오지 않을 때엔 실제로 십시일반하여 도시락 없이 온 친구들에게 점심을 거르지 않도록 하였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당시 가난하다고 해서 형편이 나은 친구들로부터 멸시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법은 드물었다. 많은 국민들이 절대빈곤에 허덕였으므로 거기로부터 모두 같이 하루 빨리 벗어나보자는 암묵적 연대적 합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가난에 대하여 최소한 연민의 정은 존재했었다. 문인, 예술가들 대부분은 가난을 동반자로 여기고 사랑까지 하는 이도 많았다.

이와 같은 가난은 고도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신흥기업가들도 많이 늘고 빈부 차이가 증가한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가난을 낯설어하지 않았고 엄혹해지는 폭압적 정치상황 속에서도 동병상련의 정이 남아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비록 오늘날보다 삶이 찌들어 있었지만 대체로 순박하고 선량한 편이었다. 당시의 기록사진들을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대학원 마치고 유학 가기 전엔 자가용이 별로 없던 서울, 그러나 유학 마치고 돌아온 88년의 서울은 자가용의 홍수였다. 주로 밭이나 공한지로서 사실상 서울이 아니었던 강남은 서울의 번화가와 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강남에 일이 있어 들렀던 어느 찻집에서는 어서 오세요인사도 없었고 쥬스값을 내고 나올 때도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 30대이던 내가 20대 초반이 주로 오는 찻집에 들어가서 물을 흐려놓은 죄였던 것 같다. 이렇게 귀국 후의 첫 경험을 시작으로 나는 서서히, 옛날의 정취가 더 이상 없는 서울, 사람을 연령대와 외양과 빈부 차이에 따라 현격하게 차별대우하는 서울에 정나미 떨어져 하면서도 사회변화에 익숙해지려 했다. 그런데 다녀보니 그것은 비단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황금만능주의와 물신주의는 전국적이었다.

오늘날 가난과 가난한 사람은 멸시와 질시의 대상, 심지어는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순진하기만 할 나이의 초등학교에서 왕따가 될 조건 중 하나가 반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것이란다. 서울의 어떤 대학교에서는 강남 출신들만 따로 모여 다닌다는 말도 들린다.

가난하거나 몸이 허약하거나 불편한 급우를 돕던 옛 시절의 미덕과 공동체의식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작년에 왕따로 자살한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의 숫자가 모두 247명이었다는 버스에서의 뉴스 보도가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200511

인문대학 불어불문학전공 강충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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